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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학박사 정현석 칼럼
17-01-11 도덕적인 삶
평생을 쌓아올린 명예, 존경과 권력을 가진 우리 사회의 성공한 사람들이나 고위 공직자, 유명 인사들이 일순간의 어이없는 말실수 또는 부도덕적이며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무너져 신문, 방송, 인터넷의 주요 뉴스거리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이 뇌물수수 혹은 청탁압력 행사 등으로 검찰조사를 받기도 하고, 정부 각료 후보를 대상으로 하는 인사청문회에서는 후보의 부도덕한 행태에 대한 추궁 및 질타가 이어지기도 합니다.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재산을 편법?불법으로 취득하는 한편, 정직과 공정한 학문 정립이 최우선이어야 할 학자들마저도 논문을 조작하는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도덕한 행동들에 많은 사람들은 허탈감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간에도 ‘성공’이라는 커다란 성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치 집을 짓기 위해 기초를 다지고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리듯이 성공의 성을 쌓기 위해 하루하루 성심을 다해 노력의 벽돌을 만들고 있습니다.
성공의 성을 쌓아갈 때 그 성을 쌓아가는 요소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정치적 성공을 위한 필요 요소들을 하나하나 쌓아갈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예술적 성공을 위한 필요 요소들을 쌓아갈 것입니다. 끊임없이 학문을 익히고, 체력을 단련하며, 지식을 쌓고, 성공을 가로막는 벽을 넘기 위한 필요 요소들을 습득하면서 자신만의 성공의 성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을 쌓아올리고 완성시키기까지는 많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해당 분야의 깊이 있는 지식과 역량, 그리고 때로는 자신만이 누리는 운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공의 요소 중 하나는 윤리적 도덕성과 정직함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성공의 성을 쌓았다 하더라도 도덕적이지 못하고 진실함과 정직함이 녹아 있지 않은 성은 결국 언젠가는 구멍이 뚫리고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굳이 우리나라에만 국한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최고 권력자들이 도덕적이지 못하고 정직과 진실성이 함께하지 못함으로 인해 종국에는 무너져 내리고 비참한 종말을 맞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경쟁력이 있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정직함이 결국은 최고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회 통념상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많은 부분이 재조명되고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때론 지나온 자신의 삶이 무용담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도 하지요.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한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멘토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당화되고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어도 내면에 감춰져 있는 근간이 중요합니다. 개인이든지 하나의 조직 또는 기업이든지 기본적 근간은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의외로 많은 대기업 총수들이 매번 비슷한 사안으로 조사를 받거나 구속되기도 합니다. 큰 집단을 이끄는 리더로서 어쩔 수 없었고 억울한 측면도 있겠으나 큰 맥락에서 보면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적 근간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최근에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도덕성마저 사회문제가 되고 있어 심히 유감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도덕성이 최우선시 되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마저 진실하지 못하고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법과 규칙은 중요합니다. 법은 원칙이며 상식입니다. 원칙과 상식이 무너지면 혼잡한 거리에 신호등이 꺼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질서가 없어지고 혼란이 야기되며 난잡하고 엉망이 될 것입니다. 이런 법과 원칙의 기반 위에 우리가 살아가는 진정성은 도덕성에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도덕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요합니다.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가 발전하고 성숙되기 위해서는 법과 원칙이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도덕성이 깔려 있지 않으면 그러한 것들은 금방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누구나 정당한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본성이 많은 사람일수록 때론 양보하며 정당한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도덕적 본성이 약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보다 뭔가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자기합리화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성향이 많아지면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어느 마을에 지돌석이라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평생을 백정 일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저잣거리에 푸줏간을 내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양반가의 젊은 자제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노인의 이름을 바꿔 부르며 말했습니다.
“석돌아, 쇠고기 한 근만 다오!”
“알겠습니다.”
지 노인은 대충 고기를 잘라주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들어온 또 다른 사람은 그가 아무리 백정 출신의 천한 신분이지만 노인에게 말을 놓기가 거북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좋은 말을 골라 고기를 청했습니다.
“지 서방, 나도 쇠고기 한 근만 주시게!”
“네, 나으리. 조그만 기다리시지요.”
자신을 높여 불러준 데 기분이 좋아진 노인은 제일 좋은 부위의 고기를 뭉텅 잘라주었습니다. 먼저 고기를 받아 든 사람이 가만히 보니 두 번째 온 사람이 들고 있는 고기가 자기가 산 것보다 부위도 좋을 뿐 아니라 양도 많아 보였습니다.
화가 난 그는 노인에게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이놈아! 한 자리에서 똑같이 한 근을 샀는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이 내 것보다 더 많은가?”
그러자 노인은 태연히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손님 것은 석돌이 놈이 자른 것이고, 이 분 것은 지 서방이 자른 탓이지요!”
사회의 지도층이 되고 고위 공직자가 되어 본인의 도덕적 문제점이 드러나도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합리화시킵니다. 결국에는 화가 화를 불러 일이 더 커지게 되기도 하지요. 그러고는 분노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내가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또는 어디서나 차별을 받게 되면 분노를 느낍니다. 그런 부당성과 차별성이 사회 전체에 만연된다면 우리 사회는 개인, 계층, 집단 간 갈등과 불신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런 모습입니다. 계층 및 집단 이기주의로 서로 믿지 못하고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는 사이에 자신의 경쟁력은 물론 나라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정당한 대우란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에 따른 올바른 값을 받는 것입니다. 100을 잘한 사람에게 120의 대우를 한다거나 100을 잘못한 사람에게 50의 잘못을 탓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대우가 아닌 것입니다.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은 개개인이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발전합니다. 정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도덕적이어야만 모든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덕성은 중요합니다.
법과 규율을 다루는 공직자들은 무엇보다도 공정성을 가지고 엄격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죄를 지은 만큼의 엄격하고 공정한 죗값을 받고, 공이 있는 사람은 그 공에 대한 정당한 상을 받아야겠지요. 우리는 때론 모든 부정에 분노할 줄 알고 때론 압력을 행사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도덕적이고 양심적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의 대세를 파악하는 중심이 있어야지 혹세무민(惑世誣民)하지 않고, 올바른 판단으로 중심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길을 가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몰래 갖고 싶고, 빼앗아오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양심과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을 세움으로써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사람이 됩니다. 결국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경쟁력입니다.
‘착하면 손해 본다’는 말로 무장한 비도덕적인 사람들은 언젠가는 착하지 않은 것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지키면 손해 본다’는 말을 신념처럼 받들고 생활하는 비도덕적인 사람들은 언젠가는 지키지 않아서 더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사실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느끼지 못합니다. 도덕성은 평소에 연습이 필요합니다. 특히 도덕의 시작은 부끄러움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곽금주 서울대학교 교수는 「만족 지연연구」라는 자신의 연구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도덕성을 연구한 결과, 도덕성의 연습을 통해 도덕성이 높아진 아이들은 좌절 시에도 극복하려는 의지가 도덕성이 높아지지 않은 아이들보다 훨씬 더 강했으며 자기만족을 늦출 줄 알고 대체로 눈앞의 이익보다 자신의 양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도덕적인 아이들은 공격성이 덜 했고 또래 관계도 좋았고 과잉행동의 가능성이 낮으며 왕따 경험도 없으며 집중력도 훨씬 좋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개개인의 소소한 일상에서는 양심적이고 진솔하며 도덕적인 삶의 모습들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나의 작은 무질서와 도덕적이지 못한 사소한 것 하나는 금세 노출되고 주위에 부조화가 나타납니다. 맑은 연못에 또 다른 맑은 물이 흘러들어오면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지만, 적은 양의 흙탕물이 들어오면 맑은 연못 전체가 흐려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도덕성 회복운동에 나섰던 문봉린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살아가는 순간에는 도덕성의 중요성을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인생의 마지막에서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도덕적 가치와 양심과 진실함을 팽개치고 오로지 인생의 성공과 집착만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진정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가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는 인생은 결국 도덕적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경쟁력 있고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는 성공의 삶 속에 도덕적 가치관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의 한편에서는 온갖 부정과 권모술수가 마치 성공을 향한 올바른 최선의 방책인양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도덕적 가치관과 진솔한 양심은 그저 우스꽝스럽고 귀찮고 하찮고 거추장스러운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이 최고의 성공이요, 명예를 얻는 것이 출세의 목표라고 충동질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공은 도덕적이며 진실한 삶의 결실이라는 점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도덕적인 삶이 경쟁력 있는 삶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이 뇌물수수 혹은 청탁압력 행사 등으로 검찰조사를 받기도 하고, 정부 각료 후보를 대상으로 하는 인사청문회에서는 후보의 부도덕한 행태에 대한 추궁 및 질타가 이어지기도 합니다.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재산을 편법?불법으로 취득하는 한편, 정직과 공정한 학문 정립이 최우선이어야 할 학자들마저도 논문을 조작하는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도덕한 행동들에 많은 사람들은 허탈감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간에도 ‘성공’이라는 커다란 성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치 집을 짓기 위해 기초를 다지고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리듯이 성공의 성을 쌓기 위해 하루하루 성심을 다해 노력의 벽돌을 만들고 있습니다.
성공의 성을 쌓아갈 때 그 성을 쌓아가는 요소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정치적 성공을 위한 필요 요소들을 하나하나 쌓아갈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예술적 성공을 위한 필요 요소들을 쌓아갈 것입니다. 끊임없이 학문을 익히고, 체력을 단련하며, 지식을 쌓고, 성공을 가로막는 벽을 넘기 위한 필요 요소들을 습득하면서 자신만의 성공의 성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을 쌓아올리고 완성시키기까지는 많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해당 분야의 깊이 있는 지식과 역량, 그리고 때로는 자신만이 누리는 운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공의 요소 중 하나는 윤리적 도덕성과 정직함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성공의 성을 쌓았다 하더라도 도덕적이지 못하고 진실함과 정직함이 녹아 있지 않은 성은 결국 언젠가는 구멍이 뚫리고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굳이 우리나라에만 국한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최고 권력자들이 도덕적이지 못하고 정직과 진실성이 함께하지 못함으로 인해 종국에는 무너져 내리고 비참한 종말을 맞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경쟁력이 있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정직함이 결국은 최고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회 통념상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많은 부분이 재조명되고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때론 지나온 자신의 삶이 무용담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도 하지요.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한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멘토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당화되고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어도 내면에 감춰져 있는 근간이 중요합니다. 개인이든지 하나의 조직 또는 기업이든지 기본적 근간은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의외로 많은 대기업 총수들이 매번 비슷한 사안으로 조사를 받거나 구속되기도 합니다. 큰 집단을 이끄는 리더로서 어쩔 수 없었고 억울한 측면도 있겠으나 큰 맥락에서 보면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적 근간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최근에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도덕성마저 사회문제가 되고 있어 심히 유감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도덕성이 최우선시 되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마저 진실하지 못하고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법과 규칙은 중요합니다. 법은 원칙이며 상식입니다. 원칙과 상식이 무너지면 혼잡한 거리에 신호등이 꺼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질서가 없어지고 혼란이 야기되며 난잡하고 엉망이 될 것입니다. 이런 법과 원칙의 기반 위에 우리가 살아가는 진정성은 도덕성에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도덕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요합니다.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가 발전하고 성숙되기 위해서는 법과 원칙이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도덕성이 깔려 있지 않으면 그러한 것들은 금방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누구나 정당한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본성이 많은 사람일수록 때론 양보하며 정당한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도덕적 본성이 약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보다 뭔가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자기합리화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성향이 많아지면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어느 마을에 지돌석이라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평생을 백정 일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저잣거리에 푸줏간을 내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양반가의 젊은 자제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노인의 이름을 바꿔 부르며 말했습니다.
“석돌아, 쇠고기 한 근만 다오!”
“알겠습니다.”
지 노인은 대충 고기를 잘라주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들어온 또 다른 사람은 그가 아무리 백정 출신의 천한 신분이지만 노인에게 말을 놓기가 거북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좋은 말을 골라 고기를 청했습니다.
“지 서방, 나도 쇠고기 한 근만 주시게!”
“네, 나으리. 조그만 기다리시지요.”
자신을 높여 불러준 데 기분이 좋아진 노인은 제일 좋은 부위의 고기를 뭉텅 잘라주었습니다. 먼저 고기를 받아 든 사람이 가만히 보니 두 번째 온 사람이 들고 있는 고기가 자기가 산 것보다 부위도 좋을 뿐 아니라 양도 많아 보였습니다.
화가 난 그는 노인에게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이놈아! 한 자리에서 똑같이 한 근을 샀는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이 내 것보다 더 많은가?”
그러자 노인은 태연히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손님 것은 석돌이 놈이 자른 것이고, 이 분 것은 지 서방이 자른 탓이지요!”
사회의 지도층이 되고 고위 공직자가 되어 본인의 도덕적 문제점이 드러나도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합리화시킵니다. 결국에는 화가 화를 불러 일이 더 커지게 되기도 하지요. 그러고는 분노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내가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또는 어디서나 차별을 받게 되면 분노를 느낍니다. 그런 부당성과 차별성이 사회 전체에 만연된다면 우리 사회는 개인, 계층, 집단 간 갈등과 불신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런 모습입니다. 계층 및 집단 이기주의로 서로 믿지 못하고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는 사이에 자신의 경쟁력은 물론 나라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정당한 대우란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에 따른 올바른 값을 받는 것입니다. 100을 잘한 사람에게 120의 대우를 한다거나 100을 잘못한 사람에게 50의 잘못을 탓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대우가 아닌 것입니다.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은 개개인이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발전합니다. 정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도덕적이어야만 모든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덕성은 중요합니다.
법과 규율을 다루는 공직자들은 무엇보다도 공정성을 가지고 엄격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죄를 지은 만큼의 엄격하고 공정한 죗값을 받고, 공이 있는 사람은 그 공에 대한 정당한 상을 받아야겠지요. 우리는 때론 모든 부정에 분노할 줄 알고 때론 압력을 행사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도덕적이고 양심적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의 대세를 파악하는 중심이 있어야지 혹세무민(惑世誣民)하지 않고, 올바른 판단으로 중심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길을 가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몰래 갖고 싶고, 빼앗아오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양심과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을 세움으로써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사람이 됩니다. 결국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경쟁력입니다.
‘착하면 손해 본다’는 말로 무장한 비도덕적인 사람들은 언젠가는 착하지 않은 것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지키면 손해 본다’는 말을 신념처럼 받들고 생활하는 비도덕적인 사람들은 언젠가는 지키지 않아서 더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사실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느끼지 못합니다. 도덕성은 평소에 연습이 필요합니다. 특히 도덕의 시작은 부끄러움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곽금주 서울대학교 교수는 「만족 지연연구」라는 자신의 연구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도덕성을 연구한 결과, 도덕성의 연습을 통해 도덕성이 높아진 아이들은 좌절 시에도 극복하려는 의지가 도덕성이 높아지지 않은 아이들보다 훨씬 더 강했으며 자기만족을 늦출 줄 알고 대체로 눈앞의 이익보다 자신의 양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도덕적인 아이들은 공격성이 덜 했고 또래 관계도 좋았고 과잉행동의 가능성이 낮으며 왕따 경험도 없으며 집중력도 훨씬 좋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개개인의 소소한 일상에서는 양심적이고 진솔하며 도덕적인 삶의 모습들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나의 작은 무질서와 도덕적이지 못한 사소한 것 하나는 금세 노출되고 주위에 부조화가 나타납니다. 맑은 연못에 또 다른 맑은 물이 흘러들어오면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지만, 적은 양의 흙탕물이 들어오면 맑은 연못 전체가 흐려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도덕성 회복운동에 나섰던 문봉린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살아가는 순간에는 도덕성의 중요성을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인생의 마지막에서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도덕적 가치와 양심과 진실함을 팽개치고 오로지 인생의 성공과 집착만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진정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가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는 인생은 결국 도덕적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경쟁력 있고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는 성공의 삶 속에 도덕적 가치관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의 한편에서는 온갖 부정과 권모술수가 마치 성공을 향한 올바른 최선의 방책인양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도덕적 가치관과 진솔한 양심은 그저 우스꽝스럽고 귀찮고 하찮고 거추장스러운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이 최고의 성공이요, 명예를 얻는 것이 출세의 목표라고 충동질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공은 도덕적이며 진실한 삶의 결실이라는 점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도덕적인 삶이 경쟁력 있는 삶입니다.